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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슬픈 연대-뮤지컬 ‘빨래’를 보고

통합인문치유자 2018. 1. 19. 21:58


그 유명하다는 뮤지컬 빨래를 보았습니다. 빨래로 시작하여 빨래로 끝나는 음악극이었습니다. 연기자들의 노래, 춤, 연기 모두 수준급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경쾌한 웃음 속에 그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이 더 깊게 느껴졌습니다.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적인 삶, 무관심한 장애인 문제 등등 우리 사회 계층의 사다리 맨 밑단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삶은 고단하고 억울하고 막막합니다.  그들의 눈으로 본 우리 사회의 현실은 지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심지어 멸시로 가득합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처럼 동질감을 느꼈을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었을 겁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뮤지컬의 키워드는 ‘치유’ 라고 말이죠. 고단한 삶을 견뎌내기 위해 등장인물들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치유받으니까요. 치유도구는 빨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빨래하는 겁니다. 혼자서, 때로는 같이 빨래를 하고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서울살이의 고된 맛, 이방인으로서의 억울함을 털어놓고, 그 막막한 현실을 공유합니다. 그러면서 힘든 세상을 건너는 지혜를 터득합니다. 빨래는 일종의 치유의 상징이죠. 빨래라는 행위를 통해 그들은 신산한 삶을 털어내고 새롭게 거듭납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빨래를 마친 이들은 하얗게 다시 태어납니다. 얼룩도 없고 먼지도 없고 주름도 없습니다. 새 날, 즉 오늘을 살아냅니다. 뮤지컬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도  견디니까 너희도 견뎌’ 라고 말이죠. 이 뮤지컬의 부제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당신에게 찾아온 가장 따뜻한 위로’. 

엄혹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빨래를 하고 변신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달래고 어르고 보듬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뮤지컬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에게서, 외국인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공감해줍니다. 그리고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뮤지컬은 두 사람의 슬픈 결합과 연대를 희망으로 표현합니다. 중요한 시사점입니다.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마음과 마음의 결합, 그것만큼 귀한 것은 없을 테니까요. 서로 등 두드려주는 치유자가 있다는 건 희망일 테니까요. 

그런데 저는 불편했습니다. 이들의 슬픈 연대가 이들만의 리그로 끝나고 말아야 하는걸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찜찜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서울살이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건 뭔가. 왜 그 정체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걸까. 속에서 그런 생각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건 관객의 몫이야, 라고 말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밑단을 사는 그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치유받고 살아가면 돼, 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건 옳을까요. 그런 생각이 굳어진다면 괜찮을까요. 물론 그런 위로의 연대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연대는 근본적인 치유로 나아가는 길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 이런 슬픔이 만들어진 건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렇기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긍정적인 개선과 변화를 위해 필요한 건 뭘까요. 제 꿈을 자유롭게 펼치며 인간답게 살도록 하려면 어떤 행동이 필요할까요. 내가 할 일은 뭘까요. 이런 끝없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뮤지컬이 ‘빨래’ 입니다. 저에게는 말이죠.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