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명상학교

#그림책의_사계_영혼을_치유하다

통합인문치유자 2020. 10. 28. 11:45

<가만히 들어주었어>
-코리 도어펠드 글, 그림 |신혜은 옮김 |북뱅크 | 2019년




#1
테일러는 조각 맞추기를 한다. 마음에 드는 탑이 완성된다. 그런데 새들이 날아와 덮치는 바람에 공든 탑이 무너진다.

실의에 빠진 테일러. 제일 먼저 찾아온 닭이 이를 어째, 하며 어찌 된 것인지 말해보라고 한다. 이어 곰이 와서 화가 날 때는 소리를 지르라고 일러준다. 코끼리가 와서는 자신이 고쳐줄 테니 어떤 모양인지 떠올려보라고 하고, 하이에나는 그냥 웃어버리라고 조언한다. 타조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숨어버리라고 하고, 캥거루는 싹 치워버리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뱀은 다른 아이들 것을 무너뜨리라고 속삭인다. 못마땅한 테일러는 묵묵부답. 그러자 모두들 가버린다.

이때 혼자 남은 테일러에게 토끼가 다가온다. 다른 동물과 달리 토끼는 아무 말 없이 옆에 다가와 앉는다. 한참이 지난 후 테일러가 말한다. 같이 있어달라고. 토끼는 테일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소리 지르고 기억하고 웃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숨어버리고 상자에 넣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복수할 계획도 들어준다. 이윽고 테일러가 토끼에게 말한다.
“다시 해 볼래. 지금 당장!”

#2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의 책 『당신이 옮다』에는 부모와 어른이 귀담아들어야 금칙이 하나 있다. 꼭 삼가해야 할 말, 즉 ‘충조평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충조평판은 충고하고 조언하고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말의 줄임말이다. 옳은 지적이다. 조언과 충고는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하게 된다면 주의를 요한다. 상대가 들을 수 있는 마음밭이 되어 있으면 모르겠으되 그렇지 않다면 더 조심해야 한다. 효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상처만 안겨주기 때문이다. 평가와 판단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참지를 못한다. 상대가 놓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내지른다.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셈이다.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것을 푸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기껏 좋은 얘기라고 말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무반응이라면 이 또한 상처가 된다.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충고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그냥 들어주세요>라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다. 이 글을 읽을수록 가슴 아픈 성찰을 하도록 해준다. 지금도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당신에게 나의 말을 그냥 들어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충고하기 시작합니다.
내 부탁을 잊어버리고.

그냥 들어주기 바랄 때
당신은 내가 왜 그렇게 느끼면 안 되는지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 감정은 무시한 채로.

그냥 들어주기 바랄 때
당신은 내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런 당신은 내게 낯설게만 보일 뿐입니다.

제발 들어주세요! 내가 부탁하는 건 들어달라는 거예요.
말하거나 무얼 해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세요
충고는 값싼 것입니다.
-작자 미상의 시 <그냥 들어주세요> 중에서

#3
그림책에서 토끼를 제외한 다른 동물들이 보여준 행태는 충고가 값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의 해법은 훌륭하다.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들의 조언은 자기 몸에 맞는 옷일 뿐이다. 테일러에게는 맞지 않는다. 테일러식 맞춤 처방이라기보다 자기식 처방인 까닭이다. 이들의 문제는 딱 하나다. 테일러의 문제상황에만 초점을 맞춰 해결책을 제시할 뿐 정작 테일러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토끼는 다르다. 실망한 테일러에게 어떤 조언도 충고도 하지 않는다. 조용히 다가와 테일러의 속 얘기를 들어준다. 평가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테일러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비결이 뭘까. 같이 존재해주고 경청해준 것뿐이다. 공감과 경청의 미덕은 상대로 하여금 신뢰를 주고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의 ‘때’에, 그 사람의 ‘방식’으로 들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듣고자 하는 일이, 또 진정 듣고 싶은 말이, 그 사람 안에서 흘러나오고, 현실이 됩니다.”
그림책 말미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다. 소통할 때 필요한 순서도 적어놓았는데 의미가 깊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따라가며, 반응하기. waitㅡwaitㅡfollowㅡrespond.’ 진정 누군가를 위하는 방법이자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면서.

한 번 내 삶에 적용해볼 일이다. 가장 좋은 소통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충조평판 없이 반응하는 것.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값싼 존재에서 귀하고 값비싼 존재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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