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치유 인문학명상

순위보다 실력

통합인문치유자 2018. 1. 23. 21:07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8강에 오른 정현 선수가 화제입니다. 그는 호주오픈 테니스대회에서 8강에 오른 후 중계카메라 렌즈 위에 사인 대신 이렇게 썼습니다.
“보고 있나?”
중계를 보고 있을 한국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할까요. 재치 있는 선수입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정현 선수가 세운 8강의 기록은 지금껏 우리 테니스 역사에서 최고의 기록입니다. 그전에 이형택 선수가 16강에 오른 적은 있지만 정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겁니다. 내일(24일) 샌드그랜(97위)마저 이기면 준결승에서 테니스의 황제 로저 페더러(2위)와 만납니다. 

이번에 정현 선수는 자신의 우상인 전 세계 1위 조코비치를 3대 0으로 완파했습니다. 3시간이 넘는 혈투 끝에 말이죠. 자신의 롤 모델을 꺾은 기분이 어떨까요. 그는 “조코비치와 다시 대결하는 게 영광”이었다면서 “나의 우상이었던 조코비치를 보고 많이 따라 했더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정현을 두고 세계 언론은  ‘차세대 테니스 스타가 탄생했다’ ‘순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랭킹은 현재 58위입니다. 조코비치에게 완승한 쾌거는 순위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순위와 실력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해 준 거죠. 

그렇다고 순위가 엉터리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나름대로 경기출전, 우승횟수 등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정할 테니까요.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서 이게 지켜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변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날의 운, 컨디션, 전략이 주효하기도 하고, 생각지 못한 신예 스타가 나타나 역전을 맞기도 합니다. 바로 정현 선수가 이번 대회의 깜짝 변수인 것처럼요.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실력에 따라 순위가 바뀌고, 순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세상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저런 이유로 순위를 매기고 또 매겨집니다. 그 아수라의 세계에서 경쟁은 일상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삶은 고단하고 팍팍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대학을 줄 세우고, 심지어 대기업까지 순위를 매기니 전투 아닌 전투를 해야 경쟁에서 살아날 판입니다. 정규직, 비정규직은 또 뭐란 말인가요.

누군가가 세운 줄에 놀아나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하면 과장일까요. 사실 우리는 순위에 들려고 아등바등 안간힘을 쓰고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추종합니다. 의심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죠. 그것이 비정상인 줄은 꿈에도 모를 겁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정현 선수가 내일 4강대회에 출전합니다. 이 경기에서 맞수를 이길지, 또 지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승부의 세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까요. 예측불가능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테니스 황제와 맞붙고, 우승까지 넘보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8강에 오른 정현 선수는 이미 장합니다. 전대미문의 기록도 기록이지만, 실력으로 순위의 허상을 보여준 것, 이 진실을 만천하에 보여준 것만으로 통쾌하고 감격적이니까요.  

“아직 대회가 끝나지 않았다.” 
정현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일궈낼 또 다른 역사, 실력으로  본때를 보여주길 염원합니다. 그래서 순위의 허망함을 보여주길 희망합니다. 그런 기대를 하는 한 아직 인생의 대회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