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의 시멘트 신발은 신지 말자
마피아의 시멘트 신발은 신지 말자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빈센조>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마피아식 복수 코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조금 잔혹하다싶어 거부감이 일기도 했지만 그것이 악당을 향한, 또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식임을 이해하기에 참고 보았다.
이 드라마의 성공은 생소한 마피아식 복수극이 주는 참신함일 것이다. 죽인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죽음에 대한 심리적 공포를 극대화한다거나 고통의 불춤을 추게 한 점, 그리고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악당 스스로 자신이 죽어가는 걸 고통스럽게 지켜보도록 한 점 등은 충격적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미국 마피아가 사용하는 처형법 중에 ‘시멘트 신발’이라는 것이 있다. 젖은 시멘트에 발을 담그게 한 뒤 시멘트가 굳으면 강물에 던져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이러한 끔찍한 처형은 우리 주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대신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신발을 신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것은 심리적 형태의 시멘트 신발 신기라고 할 수 있는데,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고립과 왕따를 자초하고 자기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1년 전에 이 가공할 신발을 신었던 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내가 만든 오래된 모임이 하나 있다. 햇수로 17년쯤 된 모임이다.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이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A도 이 모임의 초창기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멤버들이 모이는 자리를 기꺼이 주선하고, 만나면 분위기를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그의 헌신을 알고 있었기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이 모임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멤버들이 많아 따로 리더를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긴 시간 동안 모임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바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매년 정기적인 모임은 참석하지만, 번개 모임은 시간되는 사람끼리 모일 정도로 강제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A가 모임의 중심이 되면서 모이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로 인해 사소한 다툼이 가끔 일어났다. 모임을 하다보면 갈등이 있게 마련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 터진 사건은 조금 심각했다. 1년 넘게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을 정도로 갈등의 수위가 높았다.
발단은 멤버 중 한 사람이 음악 스튜디오를 오픈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모두들 축하할 일이니 전과 같이 모여 함께 가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었으므로.
그런데 A만은 생각이 달랐다. 이런 약속을 하려면 자신이 중심이 되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동안 자신이 모임을 유지하는데 공헌했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자신을 제쳐놓고 약속을 정하니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멤버들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약속은 의견수렴할 거리조차 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문제는 A가 이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임 활동을 중단한 것이다.
결국 A는 오픈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정규모임에도 발을 끊었다. 그는 어떤 문자, 어떤 질문에도 응답하지 않고, 깊은 선정의 세계로 들어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다른 멤버들이 미처 A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을 사과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당분간 차가운 동토에서 나올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희망은 SNS 모임방에서 A가 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톡방에 올린 문자나 사진마다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한 사람은 읽지 않았다는 표식이었다. 모임방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고 가슴앓이를 겪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임 멤버들은 A가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매년 정기적으로 가던 여행을 떠났고, 개별적인 모임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만에 A가 돌아왔다. 그가 왜 갑자기 모임에 돌아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모임 멤버 중 한 분이 A에게 꾸준히 따뜻하게 말을 건네 왔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1년 만에 본 그의 얼굴은 전과 너무 달랐다. 얼굴은 생기가 없이 푸석푸석했고 심지어 늙어 보이기까지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그를 이렇게 망가뜨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다시 돌아온 A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멋쩍게 웃었다. 우리는 그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A의 사례는 무리와의 연결을 끊고 분리하려는 행위가 곧 고통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소속된 곳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는 욕망은 우월과 자만심에 의해, 때로는 집단에 의해 소외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이 모두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전자는 자기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후자는 남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A는 전자에 해당된다. 나는 당신들과 다르니 특별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차별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연 생태계가 그러하듯 상호의존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또 미래에도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가 우리 인간들이다. 그런데 이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면 할수록 우리는 고통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미국 시인 엘라 윌콕스는 이 점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네가 주는 달콤한 술은 아무도 거절하지 않지만 인생을 한탄할 때는 너 홀로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A와 같은 사례는 우리 주위에 넘쳐난다.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것이 문제다. 시멘트 신발 신기의 비극은 불행하게도 본인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고통을 겪게 한다는 점이다.
이제 마피아 방식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집단에서, 모임에서 분리하려는 마음이 들면 알아차리자. 나의 에고가 나에게 시멘트 신발을 신기려 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면 혼자 술 마시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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