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 필요해-명상인류를 위하여

우리가 눈처럼 살아간다면

통합인문치유자 2021. 12. 30. 09:18


올해 몇 번의 눈이 내렸다지만 즐길 만큼은 아니어서 눈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갈증을 줄 듯하다. 더 두고 봐야겠지만 12월 중반임에도 눈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올해는 함박눈을 보는 걸 늦춰 잡아야겠다. 옛날에는 ‘기설제’라 하여 조정에서 관리를 내려 눈 내리기를 청했다고 하는데, 눈을 보려면 이와 비슷한 의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돌아보면 눈 내리는 날은 눈밭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언제나 즐거웠다. 요즘이야 눈길에 운전할 일 걱정으로 몸을 사리는 편이지만 어렸을 때에는 눈사람 만드느라 손과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얼어도 호호 불어가며 꼭 임무를 완수해야 사람처럼 눈 놀이에 미쳐 온종일 징그럽게 눈과 보냈다. 당시에는 나의 통제 밖에서 일어나는 이 자연현상이 신기하고 경외할 만한 사건이었다.

눈 하면 오세영 시인의 <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림책 수업을 준비하다 만난 이 시는, 자신을 낮추고 또 낮은 곳에서 녹는 눈의 속성에 견주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넌지시 제시해준다. 사랑하면서 살려면 눈처럼 처신하라는 시인의 목소리가 맑아서 참 좋은 시다.

눈 / 오세영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

살얼음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가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 물소리
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

이 시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이 세상에 낮은 곳을 향해 차별 없이 자신을 쏟아붓는 것으로 눈만한 게 있을까싶다. 세상에는 자신을 알아달라고 영혼까지 파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낮은 곳으로 투신하며 모든 더러운 걸 덮는 눈의 행위는 시인이 말한 사랑, 그 숭고함 자체라 할 것이다.

이런 눈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그럼에도 문득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일평생 강원도 원주에서 살며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았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나락 한 알 속에서 우주를 보았던 그의 영성적 삶과 사상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젊은 김지하 시인에게 ‘밑으로 기라’고 한 그의 말은 가끔 삶에 염증이 날 때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게 했다. 선생은 1960년대 중반 여러 시위와 농성을 주도하고 학생운동을 하던, 자신을 따르는 김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말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그냥 봉사하다 간다고 생각해.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밑으로 기어야 해.”

무위당 선생의 ‘밑으로 기라’는 말은 아래로 향하는 눈의 속성과 닮았다. 낮게, 낮추며 사는 길만이 본질과 맞닿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 대선을 앞두고 진보, 보수로 편을 갈라 원수처럼 싸우고 헐뜯는 모습은 볼썽사나울 정도로 가관이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눈처럼 스스로를 낮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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