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 필요해-명상인류를 위하여

당신은 나만의 구덩이를 가졌는가?

통합인문치유자 2022. 3. 24. 17:37

#수행이필요해


일요일 아침, 히로는 아무 할 일이 없어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그러자 엄마가 “뭐 해?”하고 묻는다. 히로는 담담하게 “구덩이 파”라고 대답한다. 뒤이어 여동생이 와서 자기도 파고 싶다고 하자 히로는 단호히 거부하고 친구가 구덩이로 뭘 할 거냐고 묻자 “글쎄”라고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와서 “서두르지 마라, 서둘면 안 된다”고 충고하자, 히로는 “흠” 하고는 땅을 파내려간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땀이 흘러내리지만 히로는 포기하지 않고 깊게 구덩이를 파내려간다. 도중에 애벌레를 만나 인사를 하지만 반응이 없자 파는 것을 멈춘다. 히로는 구덩이 속에 앉아서 흙냄새를 맡으며 삽 자국을 만져보고 “이건 내 구덩이야”라고 생각한다.

조금 있으니 엄마와 여동생, 친구, 아버지가 찾아와 뭘 하느냐고 묻는다. 또 구덩이를 이용해 무언가를 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고, 아버지는 “꽤 멋진 구덩이가 됐는 걸” 이라며 칭찬한다. 히로는 그러든 말든 가만히 구덩이에 앉아 있는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여느 때와 달리 더 파랗고 더 높아 보인다. 그 사이 나비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히로는 구덩이에서 나와 깊고 어두운 아래를 내려다본 뒤 “이건 내 구덩이야”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구덩이를 메운다.

일본의 국민시인 다니카와 슌타로가 글을 쓰고 와다 마코토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구덩이》의 이야기다. 혼자 놀기 좋아하던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체험을 글로 썼다고 한다. 이 그림책이 흥미로운 점은 구덩이를 파고 메우는 일 외에 이렇다할 사건이 없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덩이의 의미를 다각도로 성찰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그림책을 보면 히로는 이유 없이 구덩이를 판다. 하지만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두 번에 걸쳐 “이건 내 구덩이야” 라고 다짐하듯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구덩이는 히로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일군 자기만의 세계, 즉 그가 이뤄낸 최초의 성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히로의 ‘구덩이’ 는 히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마음의 공간이자 휴식처로 읽힌다. 히로가 파내려간 구덩이는 누군가의 요구와 기대도 아닌, 자기 스스로 창조한 세계인 까닭이다. 그곳에서 히로는 자신을 조용히 관조한다.

또 히로가 구덩이를 파는 걸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히로가 올려다본 하늘은 전에 보던 익숙한 하늘과 다르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다른 각도, 다른 차원으로 보면 익숙한 일상이 새롭고 경이롭게 다가왔던 경험 말이다.

심리학에서 세상은 우리의 내면의 투영이라고 한다. 내면이 평화롭지 않으면 바깥 역시 평화롭지 않다. 반대로 내면이 고요하고 편안하다면 세상 역시 고요하고 편안하다. 히로의 구덩이는 자신만의 내면의 세계, 고요한 시간과 만나는 장이다. 그런 구덩이를 자유자재로 파고 메우고, 또 가질 수 있는 히로는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자신만의 구덩이를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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