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모른다

어느 날 스승이 자신이 가르치던 네 명의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미션을 주었다. 그 미션은 먼 곳에 있는 배나무를 보고 온 뒤에 자신이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 계절마다 한 명씩 다녀와야 한다. 제자들은 스승이 내준 과제의 의도가 뭔지는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계절마다 배나무를 향해 떠났다.
겨울이 되자 첫 번째 제자가 배나무를 보러 갔다. 제자는 헐벗고 초라한 나무를 보고 실망했다. 돌아온 제자는 스승에게 나무가 못생긴 데다 굽고 쓸모없어 보인다고 말했고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제자는 봄에 떠났다. 그의 보고는 대략 이랬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열매가 없어 가치가 없다고 답했다. 세 번째 제자는 여름에 떠났는데, 배나무가 흰 꽃으로 뒤덮여 있고 감미로운 향기가 났지만 열매를 깨물어 보니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가을에 떠난 마지막 제자의 보고는 앞선 제자들의 말과 달랐다. 가지마다 황금빛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데다 과즙이 풍부하고 맛있어 자연의 신비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며 흥분하여 말했다.
스승은 제자들이 본 게 모두 옳다고 치하하고는 왜 이런 과제를 냈는지를 설명했다. 제자들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스스로 갇히거나 단절되지 않은 채 매 순간 신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사계절마다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같은 배나무라며,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겪는 한 계절의 고통만 보고 나머지 계절들, 즉 다른 면들이 지닌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 이야기는 류시화 시인이 엮은 인도우화집에 나오는 우화다. 이 우화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무엇보다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 삼가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우리가 자주 범하는 일반화의 오류는 무지와 무심함을 대표한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 일부만을 보고 마치 그 사람의 전부를 안다고 퉁치는 잘못은 실로 안타깝다. 운좋게 그 실수를 바로잡는 기회를 얻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자뿐 아니라 어이없는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강심장인 사람이야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남들의 평가에 예민한 사람은 이때의 낙인이 큰 멍으로 남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느 수준, 어느 깊이까지 가봐야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같이 산 부부들조차 성격차이니 뭐니 하여 갈라서기를 쉽게 하는 판국에, 이 수준과 깊이를 가늠한다는 건 불가능의 영역으로 보인다. 심연과 같은 존재를 감히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아주 일부, 내 프레임에 걸린 것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안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현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모르는 게 많다고 고백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누군가를 모른다는 얘기의 다른 표현이며, 혹여 잘 안다고 자부해도 다 정확하다고 말할 순 없어요, 라는 수사를 섞은 겸손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순간, 종종 우리는 가장 귀한 가치를 잃는다. 안다는 사실이 자신감을 높여 줄지는 모르지만,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감은 사라진다. 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기보다는 심드렁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이 무딘 감각은 크고 작은 기쁨과 감동의 세계에서 우리를 추방한다.
서구에 부는 마음챙김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한 하바드대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는 마음챙김을 새로운 인식, 개방된 태도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녀가 정의하는 마음챙김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몰랐던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알아차리며 현재를 충실히 사는” 심리적 원리로 본다. 그녀의 다양한 실험 중에서 음악과 관련 실험이 있는데, 그 실험의 핵심은 이렇다.
그녀는 먼저 유명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과거에 가장 감동적이었던 연주를 똑같이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같은 곡을 연주하되 전과는 다르게 변화를 주어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이를 관객과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감상을 물었다. 관객은 두 번째 연주가 더 감동적이었다고 답변했고,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래식음악 세계는 악보를 철저히 준수해야 하는 만큼 큰 변화를 주긴 어려웠지만, 작지만 새로운 변화,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한 두 번째 연주에 높은 점수를 준 이유가 뭘까.
우리가 안다는 건 우리의 감각을 식상하게 만든다. 따라서 무언가 안다고 말하는 것엔 주의가 필요하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당신의 아이, 당신의 남편과 아내를 모른다고 생각해보자(사실 잘 모른다. 그 많은 가족 내 갈등을 생각하면).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신선하고 새롭게 느껴질 것이며 새로 알아가는 재미로 설렘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쌩깐다’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는 말라. 당신도 그렇게 해 달라. 나를 안다는 사실을 내려놓고 모른다는 마음으로 대해 달라. 건강한 긴장이 주는 경이로움과 기쁨을 누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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