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처음 접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림책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였죠. 그림책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 지구 연식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살던 집은 도서관에서 100여 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나 저를 위해서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 둘을 데리고 즐겁게 도서관 나들이를 했습니다. 주말이면 빼놓지 않고 하는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도서관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 덕분이지만 두 아이를 양쪽 무릎에 앉히고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었던 경험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주말마다 도서관에서 뒹굴뒹굴 대다가 도서관 문을 나올 땐 자연히 손에 그림책이 들려져 있었고, 빌려온 책들은 아이들이 잠자기 전에 해치워버리는 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또다시 도서관행. 아이들이 어렸을 땐 이런 나날의 반복이었죠.
이때 문득 깨달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그림책은 바로 제 이야기라는 거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제 자신을 발견하고, 현재 겪고 있는 영혼의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이 보였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과제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습니다. 이러한 자각 경험은 그림책이 가진 경이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고, 놀라운 성찰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눈물을 쏟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눈물샘을 자극했던 그림책들은 저의 자산이 되어 그림책을 이용하여 치유작업을 할 때 더없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심신치유를 공부할 때의 일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게스탈트 심리치료 기법 중 문학시연 기법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그 발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발표를 준비할까를 고민하다가 그림책을 읽어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제가 고른 그림책이 <노란 양동이>입니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책중 하나인데, 내용은 누군가가 숲속에 두고 간 노란양동이와 주인공 새끼 여우가 일주일 동안 같이 지내면서 겪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우는 일주일이라는 기한을 두고, 이때가 지나면 자신의 소유물로 삼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는 사이 매일같이 노란 양동이 찾아가 양동이로 꽃밭에 물도 주고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정해놓은 일주일이 되던 날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양동이가 될 걸 철썩 같이 믿던 새끼 여우는 깜짝 놀랍니다. 양동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놀란 친구들이 와서 위로하지만 서운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짧지만 강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새끼 여우는 노란양동이와 같이 했던 일주일의 시간과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며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합니다. 울면서 떼를 써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마음을 토닥이는 새끼 여우의 태도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믿는 소유론적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노란 양동이와 함께 지내며 쌓았던 즐거움과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새끼 여우의 존재론적 삶으로의 의식 전환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겁니다.
그림책을 다 읽어주었을 때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양한 심리적 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놓았던 겁니다. 그림책이 치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눈물을 쏟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 또한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날의 생생한 체험은 그림책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고, ‘지금-여기’의 인지적 통찰을 제공하는 마음챙김 명상과 그림책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림책명상 프로그램이 탄생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그림책을 읽고 명상을 하며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을 통해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는 치유세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김기섭의수행이필요해
#참새방앗간
#노란양동이
#그림책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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