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명상과 묵상독서, 마음챙김 요가(몸살림), 자기감사, 감동일지 쓰기, 좋은 점 발견하기와 같은 몸·마음·영 모듈의 통합생활수련을 하며 ‘마음챙김 데이’를 일상의 삶에 통합합니다. 꾸준히 참여할 분 환영!! 비용은 12회기 30만원, 기존 회원 25만원. 분할 납부도 가능. *4월 12일(토)~6월 28일(토).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11시 30분.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
몇 년 전 세계적인 영적 스승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일요독서명상 시간에 멤버들과 스님의 책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를 읽었습니다.
다음은 책에 나오는 틱낫한 스님이 어린 승려 시절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스승이 어린 틱낫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밖에 나가서 대나무 막대기를 하나 갖다 주겠나?”
그 말을 듣자 어린 승려는 스승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문도 닫지 않은 채 서둘러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자 스승이 틱낫한을 불렀습니다. “그대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문을 닫지 않았구나. 다시 하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틱낫한은 마음을 집중하고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면서 문 쪽으로 걸어갑니다. 손잡이를 잡고,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문을 엽니다. 그런 뒤 깨어있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문을 닫고 숨을 내쉽니다. 대나무 막대기가 있는 곳까지 걷는 수행을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그날 이후 진정으로 문 닫는 법을 깨달았다고 회고합니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걸 이때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을 잃어버린 채 다니지 말라고,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큰 고통을 불러온다고. 이 이야기는 이 책 7장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스님이 지은 많은 책 중에서 독서명상시간에 이 책을 고른 까닭은 20여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명상이라는 세계에 첫 발을 내디딘 초보 명상가에게 이 책은 신선하고 강렬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스님이 강조하는 ‘우리는 이미 도착해 있다’는 말씀은 저에게 공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커다란 장군죽비에 등짝을 소리 나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데, 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자꾸 가려느냐는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삶은 서둘러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일과 하나 되지 못한 채 분열과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언제나 마음은 미래에 가 있어서 분노와 좌절, 희망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말씀을 접하고 머리에 지진이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순간 들었고, 표류하던 삶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하기 어렵습니다.
스무 해쯤 지나 다시 이 책을 만나니 오랜 친구를 상봉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폭 안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말한 대로 ‘깨어있는 삶의 예술’을 일상에서 만드는 수준은 못 되었지만 그래야지, 그렇게 해야지 하는 마음을 다잡게 해 주었습니다.
이번에 읽으며 새롭게 다가온 것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스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깨어있는 마음, 호흡, 걷기, 미소 짓기. 이 네 가지는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공통적으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의 집임을 깨우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행복과 평화, 기쁨을 발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대의 진정한 집은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지금 이 순간 푸른 대지 위를 걷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평화와 아름다움과 만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스님은 믿음이 아니라 수행을 제안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오는 길을 발견”하는 수단으로써의 명상 수행입니다. 스님은 명상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고통의 본질을 깊이 살펴보는(관찰하는) 일이며, 이로써 고통을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치료방법’입니다. 또 ‘매 순간 자각하면서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저에겐 매 순간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고, 깊이 듣고, 깊이 살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스님은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스님이 생전에 전한 메시지를 살피고 삶 속에서 체현한다면 스님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스님의 당부대로 매 순간 깨어있는 마음으로 깊이 바라보고 자주 멈춤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킹 목사는 우리가 상호의존하며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늘 강조했습니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평화를 이뤄내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일관된 정신을 보여주는 글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상호관계망에 걸려 있는데, 관계망이 씨실과 날실로 짜이면 운명이라 불리는 하나의 옷이 된다. 무엇 하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 모두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이 간다. 우리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현실구조 때문에라도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
잠시 멈춰 서서 전 세계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아침에 출근을 할 수조차 없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욕실로 간 뒤 샤워용 스펀지에 손을 뻗는다. 바로 태평양섬 주민이 건네준 것이다. 우리는 비누를 집어 든다. 비누가 집에 있는 건 프랑스인 덕택이다. 우리는 이제 주방으로 가서 모닝커피를 마신다. 이 커피에는 남미 사람들의 노고가 배어 있다. 어쩌면 커피 대신 차를 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차는 중국인이니 부어준 것이다. 아침으로 코코아를 마시고 싶다면 서아프리카인의 덕을 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식사로 토스트를 먹는다면 제빵사는 말할 것도 없고 농부가 땀 흘린 덕택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아침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전 세계의 절반이 넘는 국가에 의존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 구조가 이렇게 짜여 있다. 이 세계는 이렇게 상호 연관된 특성이 있다. 지구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현실이 이렇게 상호연관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기본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에디 자카파가 지은 《비폭력으로 살아가기》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고통은 주로 단절과 고립에서 옵니다. 단절과 고립은 우리를 외롭게 하고, 연약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에고가 고립을 선언하는 순간, 우리의 바깥세상은 위험하고 예측불가능한 세계가 되고, 그때부터 우리는 지나친 방어기제 속에 갇힙니다. 정작 써야 할 곳에 에너지를 쓰지 못하고 초조와 불안과 싸우느라 에너지를 과도하게 쓰게 되고, 마지막에는 엄습하는 감정 폭풍에 휩쓸리고 맙니다.
당신이 즐거울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두들 같이 웃으니까요. 당신이 우울할 때는 다릅니다. 당신만 우울할 뿐,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이 우울할 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펴보세요.
우리네 삶이 세계 절반이 넘은 국가에 의존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의 말대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상호의존성과 연결성에 대한 자각,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시작입니다. 이 자각은 우리가 한 배를 탄 동지임을 일깨워줄 테니까요.
에디 자파카는, 우리가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타인의 행동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에, 우리는 모두가 옳은 방향으로 향하도록 조심스레 줄을 당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결이라는 자각으로 하나 될 때 우리의 미래는 조금 더 밝고 희망도 더 커지겠지요?
*숙고명상 개인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그런 세상을 위해 당신이 작은 기여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와 저기,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삶도 없으리라.
우리의 교육은 학업 향상과 입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필요한 과목들로 커리큘럼이 짜여 있습니다. 학교에서 입시와 관련한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입시전략과 전술만이라면 문제입니다. 실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살려면 국영수 외에도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회적 관계 스킬 즉 비인지적 지식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관계 맺는지 아는 건, 아이들이 원하는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학교에서 이 중요한 기술을 주요 교과목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살아가는데 정작 긴요한 인간의 생로병사와 회로애락, 돈을 벌고 관리하는 방법, 돈을 늘리는 방법도 없습니다. 연애하는 방법, 결혼하는 방법, 부모가 되는 방법, 가족과 대화하는 법 역시 없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방법, 실패에서 다시 일어나는 방법, 분노와 슬픔과 같은 힘든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도 누락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수업에 ‘집중’할 것을 강조합니다. 선생님들의 소망도 아이들이 온전히 수업에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집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주의조절이나 집중과 관련한 어떤 교육도 받았던 기억이 없습니다. 집중하는 방법 ABC라도 알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주의를 집중하는 방법을 배우면 스트레스와 관련한 증상을 가진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연구에 따르면 부정적인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친구들을 더 자비롭게 대합니다. 주의와 주의력 훈련은 학업적, 사회적, 정서적 학습 능력도 향상시킵니다. 특히 주의 조절을 돕는 명상은 아이들이 스트레스에서도 효과적으로 반응하도록 도와주고, 과제를 구성하고 시간을 조정하며 우선순위를 정하고 결단을 내리는 능력도 키워줍니다.
교육학자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은 자연성, 즉 신성을 지닌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내면에 진정한 영성이 잠재돼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아이들의 무한하고 잠재적인 능력의 발현을 촉진하고 계발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명상을 아이들의 삶 속으로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쿠 클럭스 클렌(KKK라고도 불리는 백인 우월주의자 단체) 지부를 이끌던 래리 트랩은 미국의 네브래스카 주뿐 아니라 이웃 아이오와 주에 사는 흑인과 동양인, 유대인 가족까지 공포에 떨게 한 인물입니다. 그는 여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집을 폭탄으로 테러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1991년 3월에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인도차이나 난민수용소에 불을 지르고 거기에 ‘국스 Gooks(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말) 작전’이란 이름을 붙인 장본인입니다. 그는 또 백인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TV시리즈를 방송에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마이클 위저와 그의 아내 줄리는 유대인 부부입니다. 네브래스카 주 링컨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들 부부는 곧 트랩의 표적이 되었고 여러 차례 협박 전화를 받았습니다.
트랩은 혼자 살았습니다. 당뇨병 말기 환자였던 그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위저는 전화로 그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위저는 트랩에게 식료품점에 데려가 주겠다며 도움을 제안했습니다. 트랩은 할 말을 잃었고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위저의 집 전화가 울렸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트랩이었습니다.
“밖에 나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위저 부부는 그날 밤 함께 식사하자며 트랩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트랩은 망설이다가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파트 3호실에 산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위저 부부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자 트랩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곤 나치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빼냈습니다. 이내 그들은 함께 웃고 울고 껴안았습니다.
트랩은 자신이 가입해 있던 모든 인종차별주의 단체에서 나왔습니다. 자기가 협박하거나 괴롭혔던 많은 사람에게 사과 편지를 썼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트랩은 자기가 살 날이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침실이 두 개 달린 집에서 세 자녀와 함께 살던 위저 부부는 트랩을 집으로 불렀습니다. 트랩의 상태가 악화되자 줄리는 간호사 일을 그만두고 그를 돌봤습니다. 그러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여섯 달 뒤에 트랩은 유대교로 개종했고 그로부터 석 달 뒤 사망했습니다.
이 일화는 에디 자카파가 지은 《비폭력으로 살아가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엔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장이 강하고 완고하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마치 진리인 양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신념이 스스로를 삼켜 버린 사람들,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변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변할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연민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들의 온기가 마음의 빗장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위저 부부가 인종차별주의자 래리 트랩을 변화시킨 게 좋은 예입니다. 과오를 저지른 사람에게 분노하고 비난하고 판단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비난은 비난으로 돌아오고 판단은 판단으로 돌아옵니다. 이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연민을 선택하면 됩니다. 연민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합니다. 연민은 힘이 셉니다.
*숙고명상 고집 세고 완고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게 마련이다. 당신은 그들을 어떤 태도로 대했는가? 그들을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하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만약 잠깐이라도 그들을 연민으로 대하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게 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멈추고, 존재 자체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독일 베를린에서 비통한 슬픔과 용서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을 때의 일입니다. 워크숍이 끝나갈 무렵 강의실 뒤에 있던 어떤 한 여성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소리쳤습니다.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을 줄곧 경청했는데, 제 아버지는 강제수용소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고, 저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은 얼음장처럼 얼어 있을 뿐입니다.”
그때 다른 편에 있던 한 여성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워크숍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강제수용소 이야기와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비통한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하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제 마음도 역시 얼어붙었습니다. 마치 딱딱한 돌 같아요. 제 부친은 강제수용소 감시원을 했던 나치 군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아버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소리 하나 없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무겁고 긴장 넘치는 분위기, 이어지는 정적. 이 날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딸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여성은 200명이 꽉 들어찬 대형 회의실을 곧바로 가로질러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만나자마자 서로를 부둥켜안았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의 가슴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두 사람의 포옹. 그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들의 포옹을 대신할 그 이상의 위대하고 감동적인 사건은 없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포옹한 채 위로하고 용서하고 치유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하나됨을 몸이 감전된 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프랭크 오스타세스키가 지은 《다섯 개의 초대장》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일화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인 두 여성의 포옹. 언어를 너머 많은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지금껏, 그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얼음장이 되고, 돌멩이가 된 채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그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고 치유되지 않은 채로 긴긴 삶을 살았습니다.
포옹은 이것을 무화시켰습니다. 두 사람은 아버지를 죽인 가해자, 아버지가 지은 수치스러운 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가슴으로 서로의 적의와 죄책감을 이해했고 치유와 용서를 결정했습니다. 서로 안의 적대감과 수치심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웠는지를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보편적 연민. 이런 담대한 행위가 가능했던 이유입니다. 모든 영적 전통에서는, 우리가 가진 보편적 연민을 존재의 타고난 양상이라고 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맹자가 말한,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마음, 즉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인인지심은 남의 고통을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착한 마음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심입니다. 맹자는 인간이면 이런 연민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용서는 어렵습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놓곤 합니다. 자신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한 상대를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꼽으라면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용서는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 용서가 있고 그런 조건 없이 하는 용서가 있다고 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는 자신에게 하는, 자신을 먼저 용서하는 방식입니다. 미움과 원망이 더 이상 용서를 가로막지 않는 방식입니다. 나의 괴로움을 내려놓기로 작정한 용서입니다.
조건 없는 용서를 말하면 분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과나 회개 없이 용서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이 사회의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이런 방식의 용서는 허용되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당연한 주장입니다. 용서 이전에 진정한 사과와 회개는 필수입니다. 저 또한 이 과정을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용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측면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비난과 원망과 저주와 적개심과 수치심과 죄책감과 같은 감정은 당자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삶을 망가뜨립니다. 주변에 이런 고통의 감옥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용서입니다.
우리 마음속엔 연민의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다. 너와 네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각성 경험은 삶을 소중하게 하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사는데 긴요합니다.
연민의 지혜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행복하려면 가해자, 피해자인 우리 자신에게도 연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는 그중의 하나입니다. 세계적인 영적 스승인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연민을 실천에 옮겨 보세요.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그때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행복해지려면, 당신 자신에게 연민과 자비를 허하라. 달라이라마가 전하는 행복 레시피입니다.
*숙고명상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건을 떠올려보라. 어떤 느낌과 감정이 올라오는지를 관찰한다. 솔직하고 진솔하게 마음으로 관찰하는 일지를 써 본다. 이번에는 상대의 입장에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적어본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존경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떠올려보자. 만약 그 분이라면 어떤 현명한 해법을 제시할 것인지를 적어 본다. 그가 전한 해법과 그의 의미를 숙고하고 삶 속에 적용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옛날 인도에 끼사고타미(Kisāgotami)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재산 많은 남편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화목한 가정을 꾸렸고, 자식까지 생기자 삶이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걸음마를 뗄 무렵 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녀는 애통해하며 식어가는 자식의 몸을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믿기지 않은 그녀는 사람을 붙들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아이를 보고는 이미 죽었으니 단념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되살릴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사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거리를 헤매는 그녀는 미친 여자와 흡사했습니다.
어느 날 붓다의 제자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불러 세우고 말했습니다.
“누이여, 그 아이의 병은 무겁다. 세간의 의사로는 어림없다. 다만 한 사람, 여기에 그 병을 고치실 분이 계신다. 그는 지금 다행히도 기원정사에 머무르고 계신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얼굴이 환해져서 기원정사로 달려갔습니다. 바로 붓다 앞에 엎드린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붓다는 조용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이 아이의 병은 고치기 쉽다. 겨자씨를 대여섯 알을 먹이면 된다. 거리로 나가 얻어 오너라.”
붓다는 겨자씨를 구해 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만 겨자씨는 단 한 번도 죽음을 겪지 않은 집안에서 얻어 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죠.
“여인이여, 겨자씨는 아직 한 번도 장례식을 올린 일이 없는 집, 다시 말해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에서 구해 와야 하느니라.”
그녀는 아들을 살리고픈 마음에 붓다의 말을 마음 깊이 새기지 못했습니다. 거리로 뛰어나가자마자 대문을 두드리며 겨자씨를 구걸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꺼이 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 즉 집안에 죽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묻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불운하게도 죽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 집은 하나도 없었지요. 성안을 구석구석 뒤지며 모든 집을 두드려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단 한 번도 죽음을 겪지 않은 집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이상히 여긴 그녀는 곧 연유를 알게 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귀여운 자식뿐 아니라 소중한 부모와 남편,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죽는다는 것, 자신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왜 자신이 그 흔한 겨자씨를 얻지 못했는지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녀는 며칠을 품고 다니던 아들을 땅에 묻고 기원정사로 붓다를 찾아갑니다. 붓다의 발아래 엎드린 그녀는 하염없이 웁니다. 그녀의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려 붓다가 입을 뗍니다.
“덧없이 흐르고 변한다는 것 한 집안, 한 마을, 한 나라만의 일 아니네. 목숨 가진 중생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반드시 꼭 겪어야만 하는 일”
그 후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의 이치를 깨치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됩니다. 나중에는 깊은 수행 끝에 아라한의 경지에 오릅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끝없는 물음표와도 같습니다.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이, 죽은 뒤의 세계가 이렇다 저렇다 말해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끼사고타미 이야기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줍니다. 무상함의 이치를 거울삼으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임옥당 시인은 ‘무덤들 사이를 거닐며’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죽음과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보는 순간 / 즉시로 나는 내 생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시인은 죽음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면 역설적으로 삶은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죽음이 주는 자유를 알 때 삶을 삶답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숙고명상 우리는 죽은 뒤의 세계에 관심이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죽음이 주는 이미지가 어둡고 꺼려지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회피 전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죽음을,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려는 노력이 더 실용적이고 바른 태도에 가깝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자유롭고 소중해진다. 죽음은 곧 삶이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사촌에게서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도시의 가게들은 자신들이 파는 물건을 외부에 광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물건을 파는지 사람들이 알기 쉽게 가게 문과 창문에 커다란 간판을 내건다는 것입니다.
편지를 받고 고무된 생선 가게 주인은, 가뜩이나 장사가 되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좋은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즉시 ‘매일 신선한 생선 판매’라는 글을 쓴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가게 앞을 지나던 한 사람들이 간판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이 간판은 논리에 맞지 않아. 신선하지 않은 생선을 판다고 광고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 사람이 나가자 새로운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간판이 너무 과장 광고라고 생각하지 않아? 어떻게 매일 신선한 생선을 팔 수가 있어? 태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리면 이곳(헤움)까지 생선이 오는 데 보름이 걸리잖아. 그런데 어떻게 매일 신선한 생선을 판매한다는 거지? 양심에 어긋나게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거야?”
곧이어 또 다른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조언을 했습니다. “생선을 판다고 가게 문에 써 붙이면, 생선밖에 팔지 않은 가게에 누가 들어오려 하겠어? 지금도 생선 외에 각종 해산물을 팔고 있지 않은가? 이 간판은 장사에 방해만 될 뿐이야.”
생선 가게 주인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게 문에 ‘생선’이라는 글자를 이렇게 크게 써 붙일 필요가 있을까? 모두가 저만치에서부터 이미 자네 가게에서 나는 생선비린내를 맡는데, 오히려 글자가 비린내를 더 자극할 뿐이라고.”
이 말까지 들자, 생선가게 주인은 간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간판을 떼어냈습니다. 그런데 간판까지 떼자, 전보다 손님이 없었습니다. 가게 안은 더 썰렁했습니다. 손님이 없으니 생선은 상하게 되고 주인은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생선 가게 주인은 지혜롭다는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손님이 없어 장사가 안 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말을 귀담아듣던 랍비가 입을 열었습니다.
“신께서 그대가 하는 모든 일에 도움을 주고 계시다는 믿음을 잊지 말아야 하네. 하지만 그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그대 쪽에서도 열심히 노력해야 하네. 손님들이 그대 가게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가게 문과 창문에 ‘매일 신선한 생선 판매’라고 크게 간판을 내걸면 어떻겠는가?”
이 이야기는 류시화 시인이 엮고 쓴 《인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우리 역시 중심을 잡지 못하면 생선가게 주인처럼 되기 십상입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유리병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당연지사.
다른 이들의 조언과 충고는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그들의 조언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버려야 할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분별의 지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판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는, 서글프고 억울한 인생의 문을 열게 됩니다.
*숙고명상 스스로 귀가 팔랑귀를 가졌다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타인의 말을 들으면 귀가 솔깃해져서 그가 말한 대로 당장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안달 내는 사람이 그런 부류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줏대, 또는 중심을 잡으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진정으로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래도 답을 얻지 못했다면 머리가 아닌, 가슴에게 물어보고 가슴의 소리를 경청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미국의 중년 여성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결혼생활에 염증 난 마리아는 남편과 이혼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를 들어줄 상담자를 찾았습니다.
그녀는 상담자를 만나 남편과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해왔다며 한 시간 넘게 남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단 한마디도 남편을 좋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얘기를 다 듣고, 상담자가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 돌아가는 대로 남편과 저녁식사를 하실 테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긍정적으로 남편을 인정하는 말을 해보세요. 그런 다음에 다시 상담을 하시지요.”
그녀는 상담자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칭찬을 해요? 전 못할 것 같아요.” 그녀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완강하게 버티었습니다. 상담자가 간곡하게 부탁하자 그녀는 생각을 바꿨고, 마지못해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윽고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고, 그녀는 남편과 마주 앉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편을 인정할 만한 어떤 구석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경제공황 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그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워요."
그녀의 말을 듣자 남편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습니다. 남편의 첫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졌습니다.
한참 후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얼마가 더 지난 뒤에 남편이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고맙소."
그 뒤, 마리아는 더 이상 상담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혼할 결심도 접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윤종모 주교님의 명상 칼럼에서 소개한 일화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모양새로 말하느냐에 따라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는 옛 선인의 지혜를 보여주는 속담입니다.
나의 존재, 내가 한 일을 다른 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칭찬해 주면 자부심이 솟습니다. 사는 재미도 사는 기쁨도 커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몰라서, 또는 알면서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찬과 인정에 인색합니다. 진심 어린 말 한마디면 그동안 맺힌 가슴의 응어리가 봄눈 녹듯이 풀릴 텐데도 잘 못합니다.
자애명상 수업 때 격려 메시지를 고르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보내는 시간을 갖곤 합니다. 참여자들이 고른 메시지 중 가장 많았던 격려 문구는 “정말, 고마워!”였습니다. 왜 이 메시지를 골랐느냐고 물어보면 다른 이에게 듣고 싶었다,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었다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마리아와 남편은 전형적인 불통 부부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정과 생각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감이 이뤄지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고 갈등을 빚게 됩니다.
남편의 “고맙다”라는 대답이, 아내와 남편 사이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부부가 새롭게 연결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인정과 칭찬은 모든 관계의 접착제입니다. 다른이를 인정하고 친절하하게 대하는데 인색할 이유가 없습니다.
*숙고명상 당신은 자신에게 어떤 격려의 말을 해주는가. 만약에 누군가에게 '잘한다', ' 점점 나아지고 있어', '당신은 존재 자체로 충분해', '정말 고마워',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비난과 판단을 하면 메아리가 되어 그대로 돌아오지만 인정과 칭찬은 반드시 되돌아오진 않지만 상대와 나를 기분 좋게 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인정하는 말을 해 보자. 그런 다음 삶이 어떻게 응답하는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