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스크린도어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시 한 편이 얌전하게 바라봅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입니다. 그 시를 읽어 내려가다가 경건해졌습니다. 어느 구절 때문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 파문이 일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 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 박노해님의 “느린 걸음” 중에서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는 시인의 말이 위로가 되나요?
우리는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나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삶이 어찌 그런가요. 하루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우리네 안목입니다.
시인은, 삶을 멀리 내다보면 슬퍼하거나 포기할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까요. 그러니 이 또한 필요한 일이니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운명론을 설파하자는 건 아닙니다. 시인의 말대로 잘못 들어선 게 아니라 그렇게 받아들이는 ‘해석하는 나’가 있을 뿐이라는 거죠.
시인의 위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길은 잘못 들어선 길에서 찾아졌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처음에 시도하는 길은 모두 실험입니다. 운이 따른다면 모르겠지만 실패와 좌절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인생의 길은 누구에게나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때 치렀던 어려움은 어딜 가지 않습니다. 축적이 되어 자양분으로 쌓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한 결과를 내게 되죠. 인류의 발명품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온 겁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실패 덕분인 거죠.
시인은 누구나 ‘자신의 빛나는 길’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걸 찾게 될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 길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잘못 들어섰던 그렇지 않던 간에 어둠의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법칙이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건 아니지만 역설적이게도 어둠의 길은 곧 밝은 길로 이어집니다. 터널의 끝은 있으니까요.
과거의 어둠이 삶의 전부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어둠이 밝음을 잉태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나만의 빛나는 길을 찾는 건 지난한 일입니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 만큼 밝아 오리라는 믿음, 그걸 희망으로 삼으면 마음이 넉넉해지지 않을까요.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