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필요해

매년 여름이면 만사 제쳐놓고 여행을 떠난다. 짧게는 삼일, 길게는 일주일 가량 정처없이 길을 나선다. 가는 곳을 딱히 정해 놓지 않았지만 마음을 굳히면 신기하게도 갈 곳이 떠올랐다. 중년 남자가 가족도 없이 혼자 여행을 하니 오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민박을 하는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중 대범한 주인은 “혹시 자살하러 온 건 아니죠?” 라고 묻곤 했다. 그런 엄청난 상상을 하는 주인에겐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겠거니 받아들이며 웃으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오롯이 갖는 기회였다. 어떨 때는 낯선 사람을 만나 얼마쯤 동행하고 헤어지는 쓸쓸함을 맛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미친놈처럼 혼자 밤바다 소리를 들으며 사흘 내내 자갈밭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꽤 낭만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처절한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기도 하고,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사람들과 수다떠는 걸 좋아하는지도 그때 알았다. 여기보다 어디 다른 장소로 떠나는 게 진정한 여행이 아니란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이 고립과 멈춤의 시간은 일상에서 벗어나 무시간성에 나를 노출시키고, 온전히 발가벗은 나를 조우하도록 해주었다. 누군가의 아빠, 남편, 아들의 역할과 편집자로서의 직업적 부담에서 벗어나 나라는 틀을 깨는 해방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남은 반년의 스트레스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그림책《엄마, 잠깐만》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나의 이러한 여행이었다. 그림책 속 아이가 자주 엄마에게 잠깐만을 외치는 것이 짧지만 강렬한 일상 탈출처럼 여겨졌다. 그림책은 말한다. 질주에 익숙한 우리에게 멈추면서 삶을 즐겨보라고.
“빨리 가자.” 엄마는 아이와 길을 걸으며 자꾸 시계를 본다. 엄마 손에 잡힌 아이는 뒤따라오는 강아지에게 눈길을 주며 “엄마, 잠깐만”을 외치며 강아지와 인사를 한다. 엄마는 지하철 도착시간이 빠듯해서인지 걸음을 재촉하지만 아이는 지나치는 곳마다 “엄마, 잠깐만”을 외치며 멈추기를 멈추지 않는다. 공사현장의 아저씨와 눈을 맞추고 공원의 오리에게 빵을 나눠준다. 엄마 입에서는 자꾸 “늦겠다, 빨리” “나중에. 빨리 가자!”라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스크림 가게와 수족관 앞에서, 또 나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아이는 이를 놓칠세라 입을 벌린다. 아이의 늑장에 마음이 급해진 엄마는 “빨리! 이러다가 정말 늦어” 라며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빨리빨리를 외친다. 역으로 들어서자마자 지하철이 미끄러져 들어오고 엄마가 막 타려는 순간, 아이는 엄마의 옷을 전보다 세게 잡아끌며 큰 소리로 엄마를 불러 세운다. “엄마, 진짜 진짜로 잠깐만요.” 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엄마는 아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다. 눈앞에 펼쳐진 건 환하고 밝고 거대한 총천연색 쌍무지개. 엄마는 경이로운 눈으로 무지개를 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 우리 잠깐만…….”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림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고르라면 엄마와 아이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는 컷이다. 엄마는 입을 벌린 채 무지개를 황홀하게 쳐다본다. 아이는 엄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이 웃음을 짓는다. 이 장면에선 지하철 시간에 쫓겨 아이를 재촉하며 ‘빨리’를 외치는 엄마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놀라운 자연현상에 넋이 나간 엄마만이 존재한다.
이 그림책의 매력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무지개의 존재를 실감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곳곳마다 무지개가 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지, 깨어있는 마음으로 보면 무지개 같은 일은 우리 삶 곳곳에 나 잡아봐라, 하고 있는데 시간에 쫓겨 살고 있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란 말이 있다. 온전히 삶과 마주하는 아이의 현재성은 어른인 우리가 잃어버린 능력이다. 이 능력을 회복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틈만 나면 자주자주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주의 깊게 주위를 살피는 것이다. 그래야 삶의 경이를 만날 수 있으니까.
한 번 해보라. 잠시 멈춤은 ‘일시적 해탈’이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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