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필요해2
왜 청소는 해 가지고

나의 장모님은 텔레비전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분이다. 식사 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면 텔레비전을 켜고 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심지어 밤이 무섭다며 텔레비전을 켜놓고 주무시기까지 한다.
그러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밝다. 아침식사 때 특정 사건에 대해 물으면 거침없이 답해준다. 건강에 대한 얘기는 내 상식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예를 들면 윤여정 배우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탔을 때, 장모님은 미나리가 혈액을 깨끗하게 해주어 김치 담가 먹으면 좋다고 귀띔한다. 독서를 즐겨 하시는 분이 아니기에 이런 순발력 있는 정보는 다 텔레비전에서 배운 것이다.
그런데 어제, 장모님의 둘도 없는 친구가 탈이 났다. 화면도 나오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하게 먹통이 된 것이다. 아침식사 시간에 장모님은 낙담한 표정으로 이 불운한 소식을 전했다. 가족들 모두 이 소식을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장모님에게 텔레비전이 어떤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먼저 장모님 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켜고 끄고를 반복하며 화면에 나오는 대로 케이블 연결선을 확인하고 셋톱박스 단자의 전원을 살폈다. 그럼에도 텔레비전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번에는 전원 코드를 다시 뽑고 연결을 시도해봤으나 텔레비전은 냉정하게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답답한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움직임을 살피며 텔레비전이 원래대로 살아나기를 바라던 장모님은 이내 참았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불만이 담긴 어투로 말했다.
“방청소를 하면서 셋톱박스를 건드린 다음부터 안 나오더라고.”
장모님의 말 속에는 원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다시 살폈다. 범죄현장에 막 도착하여 증거물을 찾는 형사가 된 것처럼. 그렇지만 이번에도 텔레비전은 도와주지 않았다.
“왜 청소를 해 가지고….”
장모님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이때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어떻게 돼 가는지 보려고 방문을 열었다. 방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안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줘봐.”
아내 또한 나와 똑같이 리모콘을 이리저리 조작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텔레비전은 아내의 바람에 응답하지 않았다. 두 번째 수리기사도 나가떨어졌다.
“청소한 뒤에 잠시 나왔던 것 같은데, 왜 이때 청소를 해서….”
드디어 장모님의 초조한 마음이 폭발했다. 원망은 아내를 향했다. 장모님 방을 청소하면서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탁자의 먼지를 닦았던 이가 아내였으니까.
“청소한 뒤에도 나왔다며? 그러면 청소 때문에 그런 게 아니잖아.”
아내가 억울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그런데 왜 안 나오냐고!”
장모님도 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새 전선이 형성되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장모님은 장모님대로 서운하고 야속한 듯 보였다. 순식간에 북극에서 바람이 몰려 내려왔다. 텔레비전 때문에 곧 세계대전이 터질 판이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작은 일로 감정싸움이 잦았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내는 나에게 애프터서비스 신청을 독촉했다. 화가 났음이 분명했다. A/S를 신청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이런 일로 사람을 부르는 것이 탐탁하지 않았다.
아내의 채근에 못 이겨 마지못해 전화를 걸려던 차에, 딸이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우리는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종종 딸은 솜씨가 좋아 컴퓨터와 같은 전자제품을 잘 고쳤다.
그러나 장모님의 방으로 들어간 딸도 이번만큼은 예의 솜씨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나마 품었던 기대마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A/S를 부를 일만 남았다싶었다.
그렇지만 딸은 우리와 조금 달랐다. 고장의 원인이 텔레비전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인터넷 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딸은 머뭇거리지 않고 와이파이 공유기 전원 코드를 뺐다가 꽂았다. 이럴수가, 이 단순한 행위가 해결의 열쇠였다니. 한동안 꼼짝 않던 텔레비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화면의 지시문이 사라지고 로딩 신호가 이어지더니 텔레비전 화면이 탁 들어왔다. 그것을 지켜보던 우리는 깜짝 놀랐다. 리모컨을 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느 새 장모님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나는 얼떨떨했다. 아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딸도 자신이 고친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것인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여하튼 텔레비전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반갑고 고마운 노릇이었다. 세계대전까지 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태국의 위빠사나 수행자인 아잔 차 스님의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가지고 놀던 풍선이 터지면 우는 아이가 있고, 풍선이란 원래 쉽게 터진다는 것을 알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아이가 있다.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는, 여러분은 어떤 아이가 되고 싶은가, 라고 묻는다. 텔레비전은 기계라 오래 쓰면 이런저런 원인으로 고장이 난다. 내부 문제, 또는 외부의 문제로.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문제로. 어찌 보면 텔레비전은 풍선과도 같다. 풍선처럼 쉽게는 아니더라도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고장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우리가 이 자연스러운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오해 할 일도, 감정싸움도, 복잡한 세계대전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는 풍선이 터지면 울음을 터뜨리는 데 익숙하니까. 그게 우리의 삶을 우울하게 만든다. 비단 텔레비전뿐이겠는가.
#수행이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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