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동료가 문득 당신에게 부탁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친구, 나를 고향으로 데려다 줘.” 당신이 보기에 동료의 얼굴은 진지하고 절박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세 가지 경우로 예측된다.
첫 번째 대답은 “좋았어, 원하는 대로 해줄게.” 이런 대답이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지금은 바빠서 곤란해, 나중에.” 이 대답을 하는 순간 당신은 실망하는 동료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대답은 당신도 동료도 서먹해질 수 있다. “내가 왜?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모르긴 해도 이 일을 계기로 동료와 마주칠 일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당신이 동료와 얼마나 친분이 있는가에 따라, 현재 동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당신이 처한 상황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첫 번째 대답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가뜩이나 해야 할 일로 허덕대며 살고 있다면 더더욱.
이런 유사한 상황에서 서커스단의 난쟁이 삐에로 듀크는 첫 번째 대답을 한다. 동료의 부탁을 받아들여 피츠버그에서 오리건에 이르는 기다긴 여정을 시작한다. 미국 동부에서 시작하여 서부를 가로지는 대장정이다. 라스칼이 글을 쓰고 루이 조스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속 이야기다. 어떻게 된 건지 듀크의 여행을 따라가 보자.
함께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부리는 듀크와 곰 ‘오리건’은 친구 사이다. 둘은 오리건이 재주를 마치면 듀크가 우리로 데려다주면서 우정을 쌓는다. 어느 날 듀크는 앞에서와 똑같은 부탁을 오리건에게 받는다. “듀크, 나를 커다란 숲속으로 데려다 줘.”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듀크는 자신의 짐마차로 돌아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깨닫는다. 오리건이 살아야 할 곳은 곰 식구들과 함께 사는 가문비나무 숲이라는 것을. 결심을 굳힌 듀크는 이번 여행에서 자신도 백설공주를 만날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는다.
둘은 그렇게 무거운 짐과 주머니를 늘어뜨리게 하는 열쇠 꾸러미를 두고 서커스단을 나온다. 이들이 가려는 ‘커다란 숲속’은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간단한 거리가 아님을 곧 알게 된다. 기차표와 햄버거 삼백 개를 사고 나니 금세 돈이 바닥이 난다. 둘은 서부로 가는 차를 얻어 타며 여행을 이어간다. 때로는 밀밭을 가로질러 걷기도 하고 몰래 기차에 올라타기도 한다. 발목을 다쳐 걷을 수 없을 때는 버려진 차에서 밤을 보내기도 한다.
한 번은 흑인 트럭 운전수 스파이크의 차를 얻어 탔을 때 스파이크가 물었다.
“왜 아직 빨강코에 분칠을 하고 있소? 이젠 서커스 무대에 서지도 않는데”
스파이크가 묻자, 듀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살에 붙어 버려서요. 난쟁이로 사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흑인으로 사는 건 쉬운 일 같소?”
여행을 하면서 듀크와 오리건은 외롭고 소외된 이웃들을 만나며 진한 형재애를 느낀다.
마침내 꿈에서 애타게 그리던 오리건 숲에 도착한다. 오리건은 숲을 보자 마치 갇혀 지낸 나날을 잊은 듯 산을 향해 무섭게 질주한다. 약속을 지킨 듀크는 마지막으로 오리건과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오리건과 헤어진 듀크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길을 나선다. 눈 내린 숲길을 따라 걷는 그의 뒷모습 뒤로 살처럼 달라붙었던 빨강코가 나뒹굴고 있는 게 보인다.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은 잊고 있던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여정은 진정으로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열망과 몸부림을 대변하는 것 같아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듀크와 오리건은 행복한 부류에 속한다. 한 번의 결심으로 여행을 결행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건가.
이들이 몸담았던 서커스와 우리네 삶의 무대는 다르지 않다. 먹고 살기 위해 좋든 싫든 버텨야 하는 숙명 같은 곳,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을 견뎌야 하는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서커스단이 관객에게 웃음을 판다면 우리는 크든 작든 조직을 위해 생명을 판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들은 결행에 앞서 무거운 열쇠꾸러미를 내려놓고 떠난다. 열쇠꾸러미가 여행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랬을 테지만 어찌 보면 지금껏 둘의 삶을 지탱해온, 차마 내팽개치기 어려운 유산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미련 없이 자신들의 과거를 두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늦었지만 이제라도 새로운 삶을 찾겠다는 굳센 결단으로 보여진다.
그림책에서 마음을 멈춘 장면은 흑인 트럭 운전사가 듀크에게 왜 빨강코를 떼지 않느냐고 묻는 대목이다. 살이 붙어 어쩔 수 없다는 듀크의 대답은 안타깝고 눈물겹다. 듀크의 빨강코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남들 앞에서 웃을 수밖에 없었던 듀크의 생존을 위한 페르소나였고 진정코 자신이 살고자 했던 삶과 동떨어져 살았던 소외와 불운의 상징으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건이 커다란 숲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해오자, 듀크의 깊은 내면에서 지긋지긋했던 삶과 결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듀크가 빨강코를 뗄 수 있었던 용기 또한 산으로 질주하는 오리건의 활기찬 삶을 보면서 자신도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고픈 열망의 표현이자 과거 삶과의 절연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후 홀로 길을 떠나는 듀크의 뒷이야기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다. 하지만 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란 믿음과,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기까지 어려운 고비를 겪겠지만 그래도 전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 것이라는 희망 섞인 미래를 떠올리는 건 아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희망적인 단언을 하는 건 여행을 떠날 때 백설공주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듀크의 희망대로 그가 걷는 길 위로 스노우 화이트, 즉 백설이 조용히 내리는 것과 연관이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당신의 오리건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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