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피터는 새로 산 하얀 운동화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한껏 들떠 노래를 부른다. “난 좋아 내 하얀 운동화 정말 좋아 내 하얀 운동화.” 이렇게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로 행복하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빨간 딸기 더미를 밟는다. 금세 하얀 운동화는 빨간 색으로 물들어 버린다. 피터는 “으으 안돼” 하고 소리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피터는 울음 대신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빨간 운동화를 보면서 괜찮다며 자신을 위로한다. “난 좋아 내 빨간 운동화 정말 좋아 내 빨간 운동화.”

다시 길을 가던 중에 고양이 피터는 블루베리 더미를 밟는다. 이어 진흙 웅덩이와 물통에 연거푸 빠지고 만다. 그 바람에 피터의 하얀 운동화는 파란색, 갈색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피터는 실망하지 않고 이 상황들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걸어간다.

에릭 리트윈이 글을 쓰고 제임스 딘이 그림을 그린《고양이 피터: 난 좋아 내 하얀 운동화》(상상의 힘 펴냄)의 주요 내용이다. 이 그림책은 고양이 피터의 일상을 유머스럽게 담았지만,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멋진 마음챙김적인 그림책이 있다니! 자신의 부주의로 좋아하던 하얀 운동화가 변색되었는데도 이미 지나간 일로 여기며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며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누구라도 이 정쯤 되면 기분이 잡쳐 속상할 텐데도.

물론 피터 이야기를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손바닥 뒤집듯이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테니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 역시 떼를 쓰며 울다가도 사탕 하나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시시 웃었던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런 걸 생각해보면 피터의 회복탄력성은 어른인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능력중 하나라 할 것이다.

《붓다 브레인》을 쓴 릭 헨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오직 인간만이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현재 자신을 비난한다고 말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실망하고, 좋아하는 것을 잃을 때 좌절하는 인간은 고통 그 자체 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거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으니 깨끗하게 잊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어 자책하고 후회하는 게 바로 그러한 경우다.

나도 한때 그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때의 괴로움은 왜 이 순간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깊이 깨닫게 해주었다. 재작년 논문을 쓸 때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때만큼 힘든 고비도 없었을 것이다. 나름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계획대로 되기는커녕 틀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밀려와 제때 논문을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그 바람에 잠을 통 이룰 수가 없었다. 꿈에서조차 불안한 생각이 몰려와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시작할 걸 하는 후회와 자책이 수시로 올라왔다.

급기야 논문 쓰는 걸 포기할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밀려올 때는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워 하루 종일 손을 놓기도 했다. 이때의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바로 지옥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한동안 가슴앓이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상을 하는 중에 머리를 스치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 거였다. 이미 지나버린 일로 후회하지 말고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라는 내면의 소리였다. 과거와 미래에 집짓지 말고 되든 안 되든 현재로 돌아오라는 목소리에 나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지금 이 순간으로 기어를 바꾸고,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반응을 보이는 대신 알아차리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았다. 그렇게 매일매일 현존의 마음으로 지내다보니 편하게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큰 변화였다. 잠을 잘 자게 되니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었다.

더불어 글 쓰는 일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종종 내면의 비판자가 흠잡는 소리를 해왔지만 감정이 크게 동요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여 몇 개월 뒤에 논문심사를 통과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생각이 많으면 얼굴이 어두워진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후회하고 불안해하는 마음이 온몸을 물들이게 되니 자연히 얼굴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후회와 자책, 불평과 불만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그림책의 고양이 피터처럼 쉽게 감정을 조절할 수만 있다면 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밑져도 본전인 셈치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것에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첫 술에 배부를 수야 없겠지만 현재로 돌아오는 것을 쉼 없이 하다보면 순조롭게 일이 풀리는 건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얼굴 인상이 좋아질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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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통합인문치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