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때쯤, 사촌 여동생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의외다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일산에 같이 살지만 만나지도 전화도 않고 살아왔으니까요. “새해 복많이 받아라” 하고 말을 건네자 동생도 같은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동생의 목소리가 낯섭니다. 죄지은 사람 같습니다.
“이런 일로 전화해서 그런데, 오늘, 아버지가 소천하셨어요.”
“뭐!”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졌습니다.
여동생은 아침에 운동 다녀온 후 심근경색이 온 듯 하답니다. 병원으로 옮겨 심폐소생술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돌연사’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형제들에게 부고를 알리고, 오후 5시경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사촌 동생들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당혹감과 충격을 동시에 받은 모습입니다.
외삼촌의 나이 올해 일흔일곱. 세상을 하직하기엔 젊은 편입니다. 10년, 15년을 더 살 수 있는 건강체였습니다. 고혈압 약을 3개월 전부터 복용했고, 전날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한 게 이상증세의 전부입니다. 사고 전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집에 센 삼촌께서는 “내 병은 내가 안다”며 병원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게 화근이 될 줄 누구도 몰랐습니다.
“죽는 건 순서가 없다.”
장례식장에서 많이 들은 말입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말이 실감나게 들리는 건 나 역시 이 범주에 들어가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생과 사-. 잘 나갈 땐(또는 젊을 때는) 생과 사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은 생대로 죽음은 죽음대로 말이죠. 그러나 외삼촌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삶과 죽음은 이웃사촌이고, 둘이지만 하나라는 걸 말이죠.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습니다.
전부터 결행하려던 것이 있습니다. 살아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겁니다. 상상이 가지 않지만 ‘내가 죽는다면’이란 가정 자체가 귀한 깨달음을 줄 거라 믿습니다. 그 깨달음이 어떤 것이든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더 자각할 수 있겠죠.
올해로 82세를 맞은 프랑스의 명배우 알랭 들롱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죽음 아닌가.”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이런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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